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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름 유래

양주시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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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1, 2동

양주시의 7개 읍면 가운데 하나로 동쪽으로 포천군 소흘읍, 서쪽으로 백석읍, 남쪽으로 의정부시, 북쪽으로 회천읍과 접해 있다. 조선시대 양주목(楊州牧)의 중심지로서 동헌/사작단/향교/여단/객사 등과 같은 양주목의 주요 시설이 밀집되어 있었다. 대모산성(大母山城) 즉 양주산성이 읍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데, 이 토대 위에서 통치와 생활이 이루어지는 전형적인 읍성취락(邑城聚落) 구조를 보인다.

일제의 통치과정에서 1922년 군청과 경찰서 등 양주군의 주요기능이 의정부로 이전되면서 양주읍의 전신인 주내면(州內面)의 면소재지로 전락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전쟁을 기점으로 면소재지마저 경원선 주변의 남방리(南坊里)로 넘겨주었다.

그러나 2000년 10월 양주군청이 다시 이곳 주변으로 이전되고, 행정구역명 또한 주내면에서 양주읍으로 승격되면서 21세기 양주군 행정의 중심지로 다시 부상하고 있다. 유양리 등 9개의 법정리와 26개의 행정리로 구성되어 있으며, 대규모 아파트 단지의 건설이 추진되고 있어 앞으로 보다 많은 변화가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고읍리 일대의 고주내평야(古州內平野)는 쌀 주산지이고, 경원선이 의정부로부터 이곳을 경유하여 동두천으로 연결된다.

이름유래

양주읍이란 땅이름은 옛 양주의 읍치가 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원래 양주의 중심지라는 뜻으로 주내면으로 불렸으나 2000년 10월 1일 양주읍으로 승격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주내라는 이름은 주(州)로 끝나는 이름을 가진 각 지역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를 뜻하는 것으로 전국에 분포되어 있으나, 양주읍 남방리에 있는 경원선역 이름만이 전국에서 유일하게 주내역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다.

회천1, 2, 3, 4동

양주시 7개 읍면 가운데 하나로 양주시에서 도시화가 가장 진전된 핵심 지역이다. 동쪽으로 포천군 포천읍 및 소흘읍, 서쪽으로 은현면/백석읍, 남쪽으로 양주읍, 북쪽으로 동두천시와 접해 있다. 회천읍은 서쪽의 도락산(道樂山, 441m)과 동쪽의 칠봉산(七峰山, 506.6m)사이에 펼쳐 있으며, 북쪽을 향하는 강화천 상류(회암천/청담천)을 낀 분지 위에 형성되어 있다.

읍소재지인 덕정리를 비롯하여 봉양리(鳳陽里) / 회암리(檜岩里) / 율정리(栗亭里) / 옥정리(玉井里) / 고암리(古岩里) / 덕계리(德溪里) / 회정리(檜亭里) 등 7개 법정리와 56개 행정리로 이루어져 있다. 현재 원예/낙농업 및 공업시설의 확산과 덕정리/고암리 일대의 택지개발로 최근 들어 급격하게 인구가 증가하고 있으며, 교육기관은 덕정고등학교를 비롯하여 3개의 중학교와 6개의 초등학교가 있다.

특히 회암리에는 조선시대 최대의 사찰이며 무학스님과 태조 이성계, 그리고 문정왕후와 보우스님의 역사적 흔적이 살아 숨쉬고 있는 회암사지(檜岩寺地)가 있다. 한편 회천읍에는 덕정역이 있는데 경원선의 주요역으로 양주역과 지행역 사이에 있고, 1911년 10월 15일 개통되었다. 덕정역 부근에서는 매2일 / 7일마다 5일장이 열리는데, 역사기록에 등장하는 신천장이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지역 특산물로는 회암리에서 생산되는 솔잎(영양)부추가 그 명성을 널리 자랑하고 있다.

이름유래

회천이란 땅이름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회암면과 천천면 등을 합칠 때, 회암면의 '회(檜)'자와 천천면의 '천(泉)'자를 합해 만든 것이다. 따라서 회천읍의 땅이름은 두 면을 합친 데서 유래한 것이다. 실제 회천이라는 이름이 나오게 된 회암면과 천천면의 유래를 살펴보면, 우선 회암면은 조선시대 최대의 사찰인 회암사가 이곳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아울러 천천면은 '샘내'라는 우리말을 한자로 그대로 옮기는 과정에서 '천천(泉川)'으로 표기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회천읍은 회암사와 샘내에서 그 이름이 유래하였다고 할 수 있다.

백석읍

양주시 7개 읍면 가운데 하나로 동쪽으로 양주읍, 서쪽으로 파주시 광탄면, 남쪽으로 장흥면, 북쪽으로 광적면과 접해있다.

면적은 군내에서 장흥면 다음으로 크다. 백석읍은 남쪽의 앵무봉(鸚鵡峰, 621.8m)으로부터 시작하여 북쪽의 노아봉(老兒峰, 336m)에 이르기까지 한강봉(漢江峰, 436m)과 은봉산(隱鳳山, 379m) 등의 연봉을 이루어서 동서의 지형구분이 뚜렷해진다. 따라서 북쪽의 오산리(梧山里)에서부터 광적면 가납리와 광석리에 걸친 드넓은 분지가 발달되어 있고, 기타의 지역은 거의 산악지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면소재지는 오산리에 있으며, 방성리(防城里), 홍죽리(弘竹里), 연곡리(蓮谷里), 기산리(基山里), 가업리(加業里), 복지리(福地里) 등 7개의 법정리와 26개의 행정리로 이루어져 있다. 면소재지인 오산리에는 면사무소를 비롯하여 경찰지서, 농협 등이 있다. 최근 복지리와 가업리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인구가 급증하였으며, 그 결과 2001년 10월 1일 읍으로 승격되는 경사를 맞이 하였다.

이름유래

백석이란 땅이름은 방성리와 양주읍 유양리/어둔리에 걸쳐 있는 양주산성(옛 대모산성, 大母山城)에 흰 돌이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현재 양주산성에는 흰 돌이 없고, 다만 방성리에 소재한 양주소놀이굿전수회관 부근의 배나무 과수원에 흰 돌이 있어 이것을 백석의 기원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다.그러나 원래 백석은 조선시대부터 사용되는 용어로써 전국 어디에나 존재하며, 백석이라는 땅이름이 존재하는 대부분의 지역을 보면 흰 돌이라는 자연물 그대로 옮겨 백석(白石)이라고 했다기 보다는 큰 들판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ㅎ,ㄴㄷ,ㄹ이 변하여 흔돌▶흰돌▶백석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왜냐하면 홍복산을 넘어서 오든 아니면 유양리에서 양주산성을 넘어서 오든 현재의 백석지역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역시 넓은 들판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지역을 오갔던 옛사람들에게 잇어서는 산을 넘자 마자 눈 앞에 펼쳐진 넓은 들판이 크게 인상에 남았을 것이므로 땅이름을 붙이는 과정에서 ㅎ,ㄴㄷ,ㄹ이라고 하였을 것이다.

은현면

양주시의 7개 읍면 가운데 북쪽 끝부분에 위치하고 있다. 북동쪽으로 동두천시, 남동쪽으로는 회천읍, 서쪽으로는 남면 및 광적면, 남쪽으로는 백석읍과 접해 있다.

남쪽에는 도락산(道樂山, 440.8m), 북쪽에는 감악산(紺岳山, 675m), 북동쪽에는 소래산(蘇來山, 228.8m)에 둘러싸여 있으며, 신천의 지류인 상패천이 서에서 동으로 휘감아 돌아 나가면서 선암리를 중심으로 분지가 발달되어 농경지로 이용되고 있다.경지면적은 다른 면적에 비해 적지만 토지의 효용가치는 큰 편이다. 행정구역은 면소재지인 선암리를 비롯하여 6개의 법정리와 12개의 행정리로 편성되어 있으며, 선암리에는 면사무소/파출소/농협/초등학교 등이 자리잡고 있다.

최근 은현면을 가로지르는 56번 국도의 확장공사가 진행되고, 용암리에 양주시에서 최초로 세워지는 대학인 서정대학과 국군덕정병원이 들어서면서 인구가 증가하고 있어 앞으로 보다 많은 발전이 기대된다.

이름유래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기존의 묵은면과 현내면의 대부분 지역을 합치면서, 묵은면(默隱面)의 '은(隱)'자와 현내면(縣內面)의 '현(縣)'자를 합쳐 은현면이라고 하였다.

남면

양주시의 7개 읍면 가운데 하나로 양주시의 가장 북쪽에 자리잡고 있다. 동쪽으로는 은현면, 서쪽으로 파주시 적성면, 남쪽으로 광적면, 북쪽으로 연천군 전곡읍과 접해 있다. 남면은 북쪽에 감악산(紺岳山, 675m)이 있고 북고남저의 지형배치를 이룬다.

양주시의 7개 읍면 가운데 하나로 양주시의 가장 북쪽에 자리잡고 있다. 동쪽으로는 은현면, 서쪽으로 파주시 적성면, 남쪽으로 광적면, 북쪽으로 연천군 전곡읍과 접해 있다. 남면은 북쪽에 감악산(紺岳山, 675m)이 있고 북고남저의 지형배치를 이룬다.

면소재지는 신산리에 있으며, 10개 법정리와 20개 행정리로 이루어져 있다. 신산리에는 면사무소와 함께 경찰지서, 우체국, 농협, 초/중/고등학교가 세워져 소지역 중심지의 기능을 하고 있다. 한편 문산, 적성, 송우리를 연결하는 3거리에 위치한 상수리는 예부터 입암시장(笠岩場)으로 유명하다.

이름유래

남면이란 땅이름은 감악산 남쪽에 있는 지역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실제 남면의 출발은 파주 적성군에서 시작하였으므로 남면이란 땅이름은 당연한 것이었으나, 양주로 편입된 이후에는 양주지역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면이라는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외지 사람들은 양주시를 볼 때마다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면서도 남면이라고 부르는 이 지역의 땅이름에 대해 의아해 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땅이름에는 의미가 있는 것이기에 남면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유지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광적면

양주시 7개 읍면 가운데 하나로 동쪽으로 은현면, 서쪽으로 파주시 광탄면, 남쪽으로 백석읍, 북쪽으로 남면과 접해 있다. 양주시 내에서 장흥면, 백석읍 다음으로 면적이 크다.

동쪽으로 도락산(道樂山, 441m), 서쪽으로 노고산(老姑山, 400m), 남쪽으로 노아산(老兒山, 335m)에 의하여 둘러싸여 있는데, 대부분이 산악지형을 이루어져 있고, 강화천 상류변의 가납리를 중심으로 좁은 분지가 형성되어 있다.

면사무소가 있는 가납리를 비롯하여 광석리(廣石里), 우고리(遇古里), 비암리(比岩里), 효촌리(孝村里), 덕도리(德道里), 석우리(石隅里) 등 7개의 법정리와 15개의 행정리로 이루어져 있다.

가납리에는 면사무소와 함께 우체국/경찰지서/농협 등이 집중되어 있어 지역중심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며, 특히 가래비시장은 300여 년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름유래

광적면(廣積面)은 광석면(廣石面)에서 '광(廣)'자와 석적면(石積面)에서 '적(積)'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따라서 광적면의 땅이름은 두 면을 합친 데서 유래한 것이다.

실제 광적면이라는 이름이 나오게 된 광석면과 석적면의 유래를 살펴보면, 우선 광석면의 경우 현재의 광석리에 펼쳐져 있는 넓은 들판에서 비롯되었다. 즉 넓은 들판을 의미하는 너ㅂ,ㄴㄷ,ㄹ이 너본돌로 읽혀지고 이것이 한자로 표현되는 과정에서 광석(廣石)이 되었던 것이다.

석적면 또한 들판과 관련이 있는 용어이다. 즉 들판이 거듭되어 있는 이곳을 한자로 옮기는 과정에서 석적(石積)으로 표기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광적면의 땅이름은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에 있는 넓은 들판에서 유래하였다고 할 수 있다.

장흥면

양주시 7개 읍면 가운데 하나로 양주시의 가장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동쪽으로 의정부시, 서쪽으로 고양시, 남쪽으로 고양시 및 서울시, 북쪽으로 백석읍과 접해 있다.

장흥면의 면적은 63.4㎢로 군내 7개 읍면 가운데서 가장 크다. 도봉산(道峯山, 716m)과 개명산(開明山, 621.8m)사이에 있으며, 북쪽에서 남서쪽으로 곡릉천이 흐르고 있다. 산수가 빼어나며 특히 여름철에는 시원한 까닭에 송추와 일영은 서울시민의 유원지로 일찍부터 발달하였다. 구비구비 흐르는 옥류 연변에 천막장/풀장/산장 등의 관광객을 위한 위락시설이 집중되어 있다. 따라서 토지의 이용도 딸기/과실/관상수를 재배하는 관광농원과 낙농업이 번성하여 군내에서 도시근교 농업의 성격이 가장 뚜렷하다.

현재의 장흥면은 7개의 법정리와 11개의 행정리로 구성되어 있으며, 면사무소는 일영리에 있다. 최근 부곡리와 석현리에 아파트단지가 조성되면서 인구는 증가 추세에 있으며, 앞으로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가 장흥을 관통하게 되어 잇고, 교현리에 인터체인지가 마련되면 보다 많은 변화가 이루어 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름유래

장흥이란 땅이름은 조선시대 후기부터 사용된 것으로 기록에 전하고 잇다. 따라서 장흥면은 백석읍과 더불어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원래 이름이 변하지 않고 남아 있는 지역이다.

장흥이라는 이름을 우리말로 풀면 '오래도록 길이 흥한다'가 된다. 장흥이라는 땅이름을 가지고 있는 전라남도 장흥군의 경우 고려 인종때에 인종의 비인 공예태후 임씨의 고향이라 하여 장흥이라고 고친 예에서 볼 때, 장흥면 또한 정치적 배려에 의해 이름이 지어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즉 조선 중종의 첫째 부인인 단경왕후 신씨의 고향이면서, 동시에 단경왕후 신씨의 아버지인 신수근을 내몰고 중종반정에 앞장서 결국 영의정에까지 오르는 성희안의 고향이라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실제 조선왕조실록에서 서산(西山)이라고 표현되고 있는 이 지역에서 왕들이 자주 사냥을 나오고 있고, 더욱이 한양과 통하는 길목에 있었기 때문에 이 지역은 정치적으로 밀접한 연관성을 가질 수 밖에 없었던 곳이다. 결국 장흥은 정치적 배려에 의하여 지어진 땅이름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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